美 압박 속 높아지는 韓 약가정책 변화 요구…“ICER 탄력 적용 필요”

美 압박 속 높아지는 韓 약가정책 변화 요구…“ICER 탄력 적용 필요”

기사승인 2025-07-11 06:00:09 업데이트 2025-07-11 10:02:48
쿠키뉴스 자료사진

수출 의약품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국가로 미국이 한국을 지목하며 국내 건강보험 약가 정책에 대한 유연성 확대 요구가 커지고 있다. 희귀·난치질환 환자들의 신속한 치료와 의약품 접근성 확대를 위해 예외 규정의 범위를 넓힌 탄력적 약가 정책이 운영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미국제약협회(PhRMA)는 최근 한국을 포함한 9개국과 유럽연합(EU)을 ‘미국산 의약품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자국 산업에 피해를 주는 국가’로 지목하며 미국 정부 측에 무역 협상을 통한 약가 정책 개선을 촉구했다.

미국은 한국의 약가 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미국의 주요 59개 수출 무역 장벽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한국 제약·의료기기 산업이 가격 책정과 환급 정책 부문에서 투명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혁신 신약 개발사를 지원하기 위해 운영 중인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 정책’의 투명성에도 우려를 제기했다. 혁신형 기업으로 선정되면 세액 공제, 연구 개발 지원, 약가 우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인증을 거부당한 회사에 대한 별도 설명은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USTR는 특히 한국 규제당국이 과도하고 반복적인 의약품 가격 인하를 요구하며 혁신 의약품의 가치를 적절하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낮은 약가는 해외 혁신 신약 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PhRMA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최근 10년간 전 세계에서 개발·허가된 혁신의약품 408개 중 급여 적용 후 한국에 도입된 치료제는 35% 정도에 불과하다. 외국계 신약이 국내에 도입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년이다. 세계에서 첫 출시 후 1년 안에 한국에 진입하는 신약은 비급여 도입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5%에 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신약 도입률이 18%인 것과 비교하면 3배 넘게 차이 난다.

케빈 헤닌저 PhRMA 부사장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USTR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평가 절차로 인해 제약사가 환자에게 접근까지 상당한 지연이 발생한다”며 “한국 건강보험 당국이 약값을 공정한 시장 가치 이하로 억제하기 때문에 제약 관련 예산에서 혁신 신약에 쓰는 비중이 다른 OECD 국가보다 낮다”고 짚었다.

낮은 ICER 임계값…“신약 혁신성 보장 역부족”

업계는 국내 의약품 규제기관이 임상적 이점보다 비용효과성 임계값으로 의약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목한다. 의약품의 비용효과성, 경제성을 평가하는 지표로 ‘점증적 비용-효과비율’(ICER, Incremental Cost-Effectiveness Ratio)이 사용된다. 새로운 치료법이나 약물이 기존 것에 비해 얼마나 더 효과적인지, 추가로 드는 비용은 얼마인지 등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ICER에는 임계값이 정해져 있는데, 보험급여 등재 시 ICER 임계값은 최대 허용치가 5000만원 선이다. ICER가 5000만원을 넘지 않으면 경제성이 인정되고 건강보험 급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존 치료제의 비용이 낮을수록, 신약이 연장한 생존 기간이 길수록 ICER 값은 불리하게 산출되는 구조다.

게티이미지뱅크

ICER 임계값 상향은 업계의 오랜 염원이다. 지난해 의과학저널 ‘스프링거’ 온라인판에 게재된 ‘신약 등재제도 미충족 수요 조사 연구’에서 업계 약가 담당자 93%가 뽑은 경제성 평가제도 관련 개선점으로 ‘ICER 값 상향’이 꼽혔다. 최근 항암제처럼 치료 효과는 높지만 비용이 큰 약이 연이어 출시되며 ICER 임계값이 최대 5500만원 선까지 확대되는 양상이지만, 업계는 신약의 혁신성을 보장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2018~2022년 항암제에 수용된 국내 ICER 중앙값은 3990만원으로, 최소 2496만원에서 최대 4792만원 사이에서 설정됐다. 반면 영국, 캐나다 등 유럽국가의 ICER 값은 2300만원에서 최대 1억원대까지 지정됐다. 스웨덴은 질병 중증도에 따라 최대 1억3600만원까지 수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 규모는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 작은데 약가 자체가 낮게 책정되는 구조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에 제품을 출시하는 걸 기피하는 현상이 커질 수 있다”면서 “탄력적 ICER 운영은 장기적으로 국가 보건 수준 제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3년째 ‘임핀지’ 급여 공백…환자 부담 가중

업계는 탄력적 ICER 운영 모범사례로 지난달 건강보험 급여를 인정받은 글로벌 제약사 길리어드 사이언스의 전이성 삼중음성유방암 치료제 ‘트로델비’(성분명 사시투주맙고비테칸)를 꼽는다. 트로델비의 급여 적용은 지난 2023년 5월 국내 허가 후 2년 만이다. 삼중음성유방암은 다른 유형의 유방암에 비해 진행이 빠르고 전이 및 재발의 위험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젊은 여성에서 높은 발생률을 보이고 있다.

고가의 약제인 만큼 급여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초 ICER 한계로 급여 인정이 어려울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지난해 심평원이 신약의 비용효과성 평가 기준에 ‘혁신성’을 추가해 ICER를 탄력 적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며 극적으로 급여 등재에 성공했다. 상한액은 105만2300원으로 연간 4420만원의 약값이 들지만, 본인부담금 5% 적용 시 221만원을 부담하면 된다.

전문가들은 ICER 운영 모범사례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 중 하나로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의 담도암 면역항암제 ‘임핀지’(더발루맙)를 지목한다. 담도암은 삼중음성유방암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예후가 좋지 않고 치료 옵션이 제한적인 암종이다. 초기 증상이 거의 없는 탓에 조기 발견이 늦어 수술이 가능한 상태에서 진단받는 경우는 전체 환자의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수의 환자가 종양이 다른 부위로 전이된 상태에서 진단되며, 이 경우 환자의 5년 생존율은 4.1%에 불과하다.

2022년 11월 더발루맙과 항암화학요법 병용요법이 전이성 담도암 1차 치료제로 국내 허가를 받았지만, 아직 급여 적용이 이뤄지지 않았다. 임핀지 병용요법의 경우 1년 투약 비용은 약 1억5000만원에 달한다. 반면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대만 같은 나라들은 임핀지의 임상적 혁신성을 인정해 급여를 빠르게 적용했다. 영국의 경우 담도암 치료의 열악한 현실과 임핀지가 최초의 담도암 1차 치료제라는 점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ICER 값을 적용했다.

전홍재 분당차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더발루맙 병용요법은 한국인 연구자가 주도한 임상연구를 통해 표준치료로 자리 잡아 열악한 담도암 치료 환경에서 더욱 의미 있는 약제”라며 “특히 한국인 담도암 환자에서 전체 환자군보다 높은 치료 혜택이 확인된 만큼 급여 적용이 지연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치료를 지속할 수 없는 담도암 환자를 위해 빠른 급여 적용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