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위기에 놓인 석유화학업계에 ‘선(先) 자구 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을 토대로 연말 전까지 자율 사업재편 계획안 마련을 촉구하면서, 관련 대책 수립을 놓고 업계 내 눈치 싸움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프타분해설비(NCC) 감축 비중, 감축 설비 대상 등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25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는 지난 20일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석화업계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과잉 설비 감축 및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 △재무 건전성 확보 △지역경제·고용 영향 최소화 등 ‘구조개편 3대 방향’을 수립하고, △3개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구조개편 동시 추진 △충분한 자구노력 및 타당성 있는 사업재편계획 마련 △정부의 종합지원 패키지 마련 등 ‘정부지원 3대 원칙’을 확정했다.
핵심은 자율 사업재편이다. 정부는 “책임 있는 자구노력 없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려 하거나 다른 기업들 설비 감축의 혜택만을 누리려는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기업 또는 산단별 사업재편 계획안을 연말까지 받고 진정성을 판단해 규제완화, 금융·세제 지원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고강도 사업재편 및 경쟁력 강화 계획을 연말이 아닌 ‘당장 다음 달’이라도 제출하겠다는 각오로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하면서, 올해 말까지 약 4개월의 시간이 남은 가운데 업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LG화학 등 10대 주요 석화기업들은 △270~370만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Naphtha Cracking Center) 감축 △고부가·친환경 제품으로의 전환 △지역경제 및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최소화를 목적으로 사업재편 계획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NCC 270~370만톤은 전체 생산량의 18~25% 규모다.

NCC 특성 고려해야…산단별 개편 논의 가능성도
국내 NCC 설비는 여수·울산·대산 등 3대 석유화학단지에 집중돼 있다. 전체 1470만톤 중 절반 이상이 여수산단에 몰려 있으며, LG화학·롯데케미칼·여천NCC·GS칼텍스 등 주요 기업이 642만톤 규모의 NCC를 운영하고 있다.
SK지오센트릭·대한유화 등이 위치한 울산산단은 176만톤 규모의 NCC를 운영하고 있으며, 프로판 탈수소화(PDH) 기반 설비 비중이 높다. 한화토탈에너지스·LG화학·현대케미칼 등이 위치한 대산산단은 정유-석화 융합 구조를 바탕으로 478만톤 규모의 NCC를 운영하고 있다.
전체의 최대 25%에 해당하는 NCC를 감축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균등 감축, 기업 간 설비 통합, 정유-석화 수직계열화 및 중소형 설비 우선 정리, 노후 설비 중심 감축 등이 거론된다.
다만 NCC 설비 특성상 입지 및 생산 조건이 각각 상이해 모든 기업이 일괄적으로 균등하게 감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NCC에서 생산된 기초원료(에틸렌 등)가 대부분 같은 산단 내 다운스트림 공장에 액화 상태로 직송되는 만큼, 균등 감축에 따라 장거리 운송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주요 산단별로 최소 하나 이상의 대형 NCC가 보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울러 노후·중소형 설비를 중심으로 정리하게 되면 효율성·현대화 등 장점을 얻을 수 있으나, 산업구조 편중 및 대기업 중심화가 우려되고, 이에 기반한 지역 고용, 경제 충격 등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 같은 특성들로 인해 기업 개별 단위보다는 산단별 재편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가운데,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조직구조 문제도 넘어야 할 산으로 꼽힌다.
LG화학·SK지오센트릭 등 단독 법인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경우 자사 이사회를 통해 의사결정이 가능하지만, 산단 소재 NCC 대부분은 합작법인(JV) 형태로 지어져 운영되고 있어 기업 간 조율이 필요하다. 여천NCC(한화솔루션·DL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한화임팩트·토탈에너지스), GS칼텍스(GS에너지·셰브론), HD현대케미칼(HD현대오일뱅크·롯데케미칼) 등이 그 예다.
특히 여천NCC의 경우 지난 3월과 이달 초 각각 약 2000억원, 3000억원 규모의 긴급 자금을 공동 출자하는 과정에서 한화솔루션-DL케미칼 간 갈등이 심화하기도 했다. 여천NCC는 NCC 설비 기준 LG화학(338만톤), 롯데케미칼(233만톤)에 이어 국내 3위 규모다.
석화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계획 발표 이전부터 NCC 통·폐합 등 물밑 논의는 이어져 왔다”며 “앞으로 남은 약 4개월 동안 주요 기업 간 협업 논의가 더 활성화될 것으로 보고 있고, 특히 첫 번째 계획안 사례에 많은 관심이 모일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업계에선 지난 6월부터 HD현대그룹과 롯데케미칼이 대산에 보유한 NCC를 통합하는 내용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