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오후,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정부의 금융감독체계 개편안 처리를 하루 앞두고, 금융감독원 직원 1200여명이 조직의 존립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
금감원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이날 오후 6시30분 여당과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감독원 조직개편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금감원 설립 24년 만의 첫 야간 집회이자 두 번째 대규모 장외 투쟁이다.
이날 현장은 ‘조직 개편’에 반대하는 직원들의 결연한 의지로 가득했다. 집회 시작 30분 전부터 모여든 직원들은 형광 조끼와 비옷을 맞춰 입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형성했다. 이들의 손에는 ‘IMF가 요구하는 금감원 독립성 보장해라’, ‘임원 자리는 증가! 감독효율은 감소!’ 등 문구가 적힌 손팻말과 형광봉이 들려 있었다. 일부는 빨간 띠를 머리에 둘렀다. 한 직원은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조직이 분리돼 금융 소비자들이 흘리게 될 눈물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라며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밥그릇 아닌 소비자 보호 위한 저항…명백한 개악”
마이크를 잡은 윤태완 금감원 비상대책위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월급을 올려달라거나 밥그릇을 더 챙겨달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며 “오직 국민의 재산을 지키는 금융감독의 파수꾼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윤 비대위원장은 이번 정부 개편안을 ‘개악(改惡)’이라 규정했다. 그는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금감원을 쪼개는 것은, 실상 기관장과 고위직 자리 마련을 위한 조직 해체”라며 “수십 년간 축적된 ‘감독-검사-소비자보호’ 연계 시스템을 와해시켜 오히려 소비자 보호 역량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진정한 금융소비자 보호와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금감원을 쪼개고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저지돼야 한다”고 목 놓아 외쳤다.
연이어 정보섭 노조위원장 직무대행이 개편안이 가져올 현실적 폐해를 지적했다. 그는 “금소원 분리시 전산 시스템 비용만 4000억원 이상 소요되는 등 막대한 시간과 행정 비용 낭비가 우려된다”면서 “민원 창구도 이원화돼 국민 피해가 불가피하다”고 꼬집었다.
특히 ‘공공기관 지정’이 금융감독 독립성을 정면으로 훼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 직무대행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는 관치금융의 폐해를 막기 위해 감독기구의 독립성을 강력히 요구했다”면서 “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 정부가 예산과 인사에 개입하게 돼 결국 관치금융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했다.

위원장들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직원들은 일제히 하얀 형광봉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역행하는 금소원 분리 철회하라!”, “금융감독 독립성을 저해하는 공공기관 지정 철회하라!”, “관치금융 중단하라!”는 구호도 연이어 외쳤다.
특히 이날 비대위는 반대에 그치지 않고 ‘새판 짜기’라는 대안을 제시하며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를 촉구했다. 금소원 신설과 공공기관 지정 대신, 금감원 내부 업무 프로세스를 전면 재설계해 소비자 보호 기능을 대폭 강화하자는 구상이다.
비대위는 최근 출범한 ‘사전예방적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 TF’를 중심으로, 금융상품의 판매 이전 설계·심사단계부터 사전적으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윤 위원장은 “현행 통합감독체계는 다수 감독·검사 부서의 긴밀한 공조로 효과적인 소비자 피해 구제가 가능하다”며 “이것이 ‘진짜’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에는 외부 인사들도 참여해 금감원 직원들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한 전직 금융회사 임원은 “소비자 보호를 위한 분리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구조”라고 꼬집었다. 안재환 인하대 경영대학 교수도 “과거 분산된 감독체계 하에서 뼈아픈 외환위기를 경험했다”며 “감독기능과 소비자보호를 강화하겠다는 취지와 정반대로 개편이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감원 직원들이 이처럼 절박하게 거리로 나선 배경에는 정부의 조직개편안 강행 움직임이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 9일 기획재정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분리하고, 금융위원회를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로 재편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발표했다. 특히 금융감독원은 금감원과 ‘금융소비자보호원’으로 쪼개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는 금융위와 독립성 약화가 불가피한 금감원 직원들은 조직 개편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25일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국민의힘이 윤한홍 정무위원회 위원장을 중심으로 금융위원회 설치법 개정안 반대에 나서면서 이날 본회의 처리는 불투명하다는 게 정치권 시각이다.
이 경우 금융위 설치법 개정안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패스트트랙을 활용하더라도 상임위 심의에 최대 180일, 법제사법위원회 체계·자구 심사에 최대 90일, 본회의 부의 후 표결에 최대 60일 등 최장 330일이 소요된다. 다음달 해당 안이 패스트트랙에 지정된다고 가정해도 내년 4월에야 통과돼 금융감독체계 개편이 마무리된다는 의미다. 해당 기간 사이 금융 정책·감독 등에도 일부 공백과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