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KBO 2차 드래프트가 열렸다. SSG 김강민은 보호선수 35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명 가능성이 낮은 가운데 김강민이 은퇴 의사를 내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화는 달랐다. 외야진 보강과 함께 젊은 선수들의 멘토 역할까지 기대하며 김강민을 지명했다. 김강민은 은퇴를 미루고 한화에서 말년을 보냈다. 2001년부터 23년간 SK·SSG 한 팀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팬들과 선수들은 혼란에 빠졌다. ‘토사구팽’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SSG가 김강민을 홀대하려 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방심’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하지만 그 방심은 치명적이었다. 김강민과 은퇴 논의가 있었다면 타 구단 지명 가능성을 막을 장치를 마련했어야 했다. 전력 손실은 크지 않았겠지만 구단의 정체성과 낭만은 그 순간 사라졌다.
2025년 2월 미국프로농구(NBA)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댈러스 매버릭스의 루카 돈치치가 LA레이커스로 향한 것이다. 미국 폭스스포츠는 이 사건을 “미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돈치치는 5년 연속 올-NBA 퍼스트팀에 선정됐고 댈러스를 파이널로 이끈 슈퍼스타였다. 팬들은 그가 팀의 상징이자 전설 덕 노비츠키처럼 평생 댈러스에 남을 선수라 믿었다. 하지만 구단주는 바뀌었고 팀의 철학도 달라졌다. 수비력 약점과 잦은 체중 변동, 부상 우려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 댈러스는 낭만보다 실리를 택했다. 선수는 떠났고 팬들의 마음엔 큰 구멍이 남았다.
낭만은 늘 효율의 논리에 밀린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 1988년 로마 유소년팀에 입단한 프란체스코 토티는 2017년 은퇴할 때까지 로마 유니폼만 입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원했던 선수였지만 그는 로마에 남았다. 수많은 준우승에도 토티는 비난받지 않았다. 오히려 우승보다 더 강한 기억을 남겼다. 한 도시, 한 팀, 한 선수가 만들어낸 서사는 지금까지도 축구 팬들의 기억 속에 ‘낭만’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K리그에서도 이슈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FC서울 기성용이 포항으로 이적하면서 팬들의 충격은 컸다. 그는 유럽 무대를 거친 뒤 서울로 복귀했고, 팬들에게는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부심이었다. 물론 원클럽맨은 아니었고 우승도 없었지만 그가 남긴 감정은 분명했다. 서울은 결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선수를 잃었다.
국어사전은 낭만을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로 정의한다. 다소 이해하기 어렵게 쓰여 있지만 결국 일상과 괴리된, 사람을 들뜨게 하는 감정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프로스포츠는 철저히 현실의 논리로 돌아간다. 이미지를 위해 낭만을 소비하더라도 결국은 결과와 수익이 우선되는 구조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 세계는 냉정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스포츠에는 낭만이 존재해야 한다. 일상에 지친 팬들은 일상 너머의 장면에 열광한다. 때로는 비현실적인 감정들이 팬들을 다시 이 세계로 이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하는 세상 속에서도 감정이 이성을 이기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낭만은 비효율에서 비롯된다. 원클럽맨에 열광하고, 오래된 서사에 감동하는 이유다. 누구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현실의 무게에 눌린 우리는 스포츠에서만큼은 낭만을 잃고 싶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