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제도 설계의 핵심인 발행 주체 자격과 규제 권한을 둘러싼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 등 법정화폐와 연동돼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한 가상자산이다. 예컨대 가장 많이 거래되는 스테이블코인 ‘테더’는 1테더당 1달러의 가치를 갖는다. 발행량에 비례해 국채 등 환금성이 높은 자산을 준비금으로 보유해 안정성을 확보한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위한 핵심 기구인 금융위원회 산하 가상자산위원회는 지난 5월부터 사실상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위원장을 당연직으로 맡는 금융위 부위원장이 공석이 되면서다. 논의가 본격화돼야 할 시점에 정책 추진 동력이 사라졌다는 평가다.
국회 내에서는 발행 주체 자격과 감독 권한을 둘러싼 이견이 포착된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덕·강준현 의원이 각각 발행 주체 기준을 담은 법안을 준비 중이지만, 자본금 요건과 감독 권한을 둘러싼 기준이 엇갈린다. 민 의원안은 자기자본금 5억원 이상, 발행 인가권은 금융위에 부여했다. 반면 강 의원안은 10억원 이상 요건을 제시하면서 한국은행의 감독 참여 가능성을 열어뒀다. 담보자산 구성과 상환 시점 규정 등에서도 두 안은 세부 내용에 차이를 보인다. 여당 내에서 서로 다른 기준이 거론된 것이다.
여당 정무위원들이 함께 이름을 올린 ‘디지털자산 혁신법’ 발의도 지연되고 있다. 당초 7월 중 발의 예정이던 해당 법안은 업계와 금융당국 의견 수렴 과정에서 이견이 커지며 8월 이후로 연기됐다. 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발행 자격, 자본금 기준, 담보 운용, 감독 주체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며 “이대로면 법안 발의 자체가 계속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정부와 한국은행 간의 시각차도 뚜렷하다. 김용범 전 기재부 1차관이 대통령실 정책실장으로 임명되면서, 민간 중심 스테이블코인 모델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김 실장은 퇴임 후 블록체인 투자사 산하 싱크탱크에서 자산운용사·핀테크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분산형 민간 발행 모델을 제안해온 인물이다. 최근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도 이 같은 구상을 반영해 일정 요건만 충족하면 민간의 발행을 허용하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행은 중앙은행의 관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이 통화정책, 금융안정, 지급결제 등 중앙은행의 정책 수행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발행자 진입 규제와 관련해 인가 단계에서 중앙은행에 실질적인 법적 권한이 부여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기존 법정통화와 연계된 디지털 자산인 만큼, 금융 시스템 안정 측면에서 한은이 직접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0일 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다수 비은행 기관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19세기 민간 화폐 발행에 따른 혼선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모든 화폐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화폐 단일성’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미국에선 1837년부터 1863년까지 27년간 모든 민간은행이 중앙은행 없이 자체 화폐를 발행했는데, 은행 신뢰도에 따라 화폐 가치가 달라져 통화질서에 혼란이 빚어진 바 있다.
금융권에선 정책 속도보다 기준 정립이 우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가 디지털금융 혁신을 앞세워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명확한 기준 없이 추진되는 제도화는 오히려 시장 혼란을 키울 수 있다”며 “시장 과열을 막기 위해 기준이 먼저 정립돼야 한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