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기업銀, 본점 길바닥서 디스커버리펀드 피해자 100명 민원 받았다

[르포] 기업銀, 본점 길바닥서 디스커버리펀드 피해자 100명 민원 받았다

기사승인 2020-06-12 06:00:00

[쿠키뉴스] 송금종 기자 =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뙤약볕 아래 사람들이 웅성이며 뭔가를 적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민원신청서다. 한 때는 ‘사장님’ ‘사모님’ 소릴 들으며 대우받던 이들이 왜 하필 이 더운 날에 길 한복판에서 민원을 신청하고 있는 걸까. 희한한 풍경에 행인들도 궁금해서 쳐다보고 간다. 이곳은 서울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 앞이며 이들은 기업은행에서 디스커버리펀드에 투자했다가 원금손실 위기에 처한 피해자들이다. 

“별일이 다 있다. 펀드가입 시킬 때만 해도 VIP라며 우대하더니 (지금은) 땡볕에서 민원을 받고 있고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저도 할머니고 손자들에게 창피해서 얘기 안 하는데 눈물이 난다.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깬다. 대통령이라도 만나서 따지고 싶다”

전후 사정은 이랬다. 기업은행 디스커버리펀드 피해보상 5차 집회가 열린 11일 오후, 집회 주최 측인 대책위원회는 ‘고객’ 자격으로 민원을 넣으려고 본점 진입을 시도했다. 모두 세 차례 시도했는데 그럴 때마다 은행은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건장한 직원들로 벽을 만들어 현관을 막았다. 대책위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들은 ‘윤종원 행장 나와라’ ‘민원을 왜 안 받느냐’며 소리쳤다. 한 피해자는 “내 돈 내고 민원도 마음대로 못하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며 한탄했다. 대치 과정에서 은행과 작은 충돌이 있었다. 불만이 터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흥분한 어떤 이로 자칫 위험한 순간이 나올 뻔도 했다. 

그럼에도 은행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급기야 현관 앞에서 민원을 접수하자고 제안했다. 곳곳에서 조롱과 야유가 나왔다. 항의가 쏟아졌지만 의사가 완강했는지 대책위도 한 발자국 물러섰다. 대신 오후 내내 땡볕에서 고생했으니 똑같이 접수하라며 민원 접수팀장을 길 한 가운데로 끌고 왔다. 이때부터 전례 없는 ‘길거리 민원 접수’가 시작됐다. 이날 집회 참석 인원이 100명 가까이 됐는데 초창기 마스크 구매행렬처럼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바깥기온이 섭씨 30도를 넘긴 한참 더운 시각이었다. 한 시민은 “VIP라며 돈 빼앗아갈 땐 잘만 하더니 이건 무슨 행상도 아니고…”라며 혀를 찼다. 은행도 이를 감지했는지 부랴부랴 테이블을 두 세 개 더 들고 왔다. 피해자들은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본인들 요구사항도 적었다. 내용들은 하나 같이 ‘계약금 회수’와 ‘책임자 처벌’ ‘윤종원 행장의 진심어린 사과’ 등이었다. 

재밌는 광경은 하나 더 있었다. 간이창구가 만들어진 데 이어 복사기 한 대가 등장했다. 신분 확인 차 주민등록증 사본이 필요한데 현장에 모인 이들의 주민증을 모두 수거할 수 없다보니 현장에서 바로 복사할 수 있도록 기기를 건물 밖으로 가지고 나온 것. 대책위 관계자들은 “이게 국책은행 기업은행의 수준”이라며 야유를 보냈다. 

이날은 마침 기업은행이 이사회를 열고 대책위가 요구하는 완전배상을 전제로 한 자율배상 가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기업은행 이사회는 자율배상 대신 ‘선가지급·후정산’안을 택했다. 선가지급금을 주고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를 거쳐 결정된 최종 보상액과 환매 중단된 펀드 최종 회수액이 결정되면 차액을 사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선가지급 비율은 최초 투자원금 50%로 정했다. 

대책위는 이사회 결정에 ‘불수용’ 입장을 밝혔다. 최창석 대책위원장은 “피해자들과 협의 없이 정한 건 부당처사”라며 “전액 배상을 받을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각오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피해자는 기자에게 “(결과를) 대충 예상했다”라며 담담히 말했다. 그는 모아둔 돈 3억으로 부동산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song@kukinews.com

송금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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